역사와 역사가

역사란 역사가에 의해 다시 씌어지고, 심지어는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임을 백두산 이야기는 잘 보여주고 있다. 기업가가 공장에서 상품을 제조하여 팔듯이 역사가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역사를 생산하고 대중에게 유포시킨다. 잘 만든 제품이 시장에서 많이 팔리듯이 설득력 있는 역사는 대중에게 널리 수용된다. 그 점에서 역사가의 역사 쓰기는 대중의 역사의식에 구속된다. 그렇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의 혁신 상품이 대중의 수요를 선도하고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듯이, 시대를 앞서가는 역사가의 창조적 연구는 대중의 역사의식을 일깨우고 나아가 집단적 기억 체계로서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그 점에서 역사가의 역사 쓰기는 대중의 역사의식을 초월한다. 그래서 역사가의 책임이 막중한 법이다. (...) 그렇기 때문에 마치 기업가에게 기업가로서의 자질과 윤리를 묻듯이 역사가들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직업으로서의 역사학'에 요구되는 자질과 윤리는 무엇일까?

우선 한 가지는 대중의 역사의식, 곧 그 집단적 기억 체계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한 관찰력이다. 훌륭한 역사가는 대중의 집단기억에서 자신을 분리한다. 그것에 매몰되어서는 그것이 언제 생겨난 것인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관찰할 수 없다. 예컨대 오늘날 한국인들은 남에서나 북에서나 백두산 신화를 즐겨 소비한다. (...) 그렇지만 훌륭한 역사가는 그 모든 대중적 향유나 정치적 동원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백두산이 언제부터 민족 구원의 상징이었는지, 언제부터 단군 국조의 강림지가 백두산으로 바뀌었는지, 언제부터 백두산 꼭대기의 그 큰 못의 이름이 천지였는지 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대중은 그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던져야만 하는 의식의 소유자들, 그리고 스스로 던져 놓은 질문에 매달려 먼지 묻은 사료를 뒤지는 특수 직능의 소지자들이 역사가이다.

그러니까 역사가는 '시대의 아웃사이더'다. 역사가는 마치 길을 가는 행렬에서 빠져나와 산 위로 올라가 지나온 길을 살피는 사람과 같다. 높은 산으로 올라갈수록 지나온 길이 잘 보인다. 역사가는 고독하다. 그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의 소지자가 역사가이다. 역사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연구하는 과거의 시대에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는 현재에서도 과거에서도 고독한 아웃사이더이다. 역사가가 시대에 개입하여 역사를 바로 세운다든가 청산한다든가 함은 참으로 우스운 말이다. 누가 역사가에게 그러한 권능과 자격을 부여했단 말인가? 역사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대중의 집단적 기억 체계로서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드러낼 뿐이다. 그것은 때떄로 대중의 일반적 기대에 반하는 용기 있는 폭로이자 비판일 수 있다. 특히 그 역사가 특정한 정치세력이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기획한 음모일 경우에 그러하다. 또한 역사가는 역사의 진행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복잡한 과정임을 드러낸다. 역사란 얼마나 불확정적이며 확률론적인 선택의 과정인가!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진보는 얼마나 느린 속도로밖에 이루어지지 않는가! 역사가는 그런 것들을 드러낼 뿐이다. 드러냄으로써 역사가는 대중이 성찰하게 한다. 그것이 역사가의 기본 책무이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이상이고자 할 때 역사가는 이미 정치가요, 그 이하일 떄 역사가는 한갓 이야기꾼에 불과하다.

(...)

당초 한두 사람이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숫자와 이야기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역사가들이 공유하는 집단인식으로 승화하여 교과서의 기술로 발전했다. 나아가 그렇게 교육된 대중의 집단기억이 거꾸로 역사가 자신을 구속하는 기묘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내가 일제가 토지의 40퍼센트를 수탈했다는 국사 교과서의 기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하자 어느 역사가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선생, 대한민국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무슨 다른 근거가 필요하단 말이오."

- 이영훈,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中 -

역사학과는 별개로 의학철학과 의학사에 있어서도 필요한 자세이다. 아울러 의학 도서관에 쌓인 먼지 쌓이고 누렇게 떠서 닳아 없어져 가는 책을 다시금 꺼내 읽는 일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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