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 관한 단상

의료제도에 관해 강의를 들으면서 보니 일본이 한국보다 제도적 측면에 있어 여러 모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발전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에 일본이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동아시아 국가보다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을 알고 싶어 일본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주진영 교수가 지은 <일본사의 이해>라는 책에서 근세 일본 및 1880년대 이전 메이지 유신 초기 부분을 읽고
일본의 근대화가 조선과는 달리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몇 가지 생각해보았다.

일본이라고 와! 서양! 와! 근대화! 하고 서양화, 근대화 일변도로 곧장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일단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막부와 240여개에 이르는 번에
심각한 재정 문제가 누적되며 막부와 각 번은 끊임없는 개혁 작업을 벌였는데,
막부가 실시한 것을 비롯해 대부분은 보수적이고 복고적인 것으로, 이른바 근대화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가령, 소위 '성공적인 개혁'도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번 정부가 특정 상품을 전매하거나
차용금을 상환하는 방식을 일방적으로 정해 버리는 등, 농민이나 상인 계급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들에 불과했다.
(물론 몇몇 번에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는 등의 개혁을 벌였으나,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 더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후 개항을 한 것은 아편전쟁과 청불전쟁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막부였고,
개항 이후에는 오히려 일시적으로 서양 세력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웅번을 중심으로 한 막부 반대 세력은 처음에는 막부를
서양 세력에 무력하게 굴복한 집단으로 규정하고 존왕과 양이를 기치로 저항하였다.
이들이 개국으로 선회한 것은 개항 후 서양인이나 공관을 대상으로 한 폭력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유럽 국가들이 이들 번을 침공하고 나서였다.

결국 1868년 보신전쟁의 종결을 기점으로 하더라도 일본이 국가적으로 일치단결해 대대적인 개국, 개혁을 실시할 수 있기까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 이래 대략 14년이 걸렸다.
폐번치헌이 단행된 1871년까지 따지면 17년이다.
이걸 조선에 대입해보면,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된 1876년부터 따졌을 때 대략 1890년에 해당한다.
조일수호조규 이후 갑오경장까지 걸린 18년과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1890년으로부터 을사조약이 체결되기까지 조선에는 불과 15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1905년의 대한제국과 비교해야 하는 것은 1883년의 일본이다.
사실, 사쓰마 번 등 웅번이 먼저 서양 기술을 도입한 경험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근대화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던 시간적 여유의 차이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1883년의 일본과 비교한다 해도 1905년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도는 초라한 것이 사실이다.
이 차이는 조선 및 대한제국의 29년(1876~1905)과 일본의 51년(1854~1905) 간에는
양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질적인 차이 또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질적인 차이는 또한 양적인 차이에서 유래했다.
우선, 일본은 근대화 추진에 필요한 정치적 구심점을 정하는 과정과
실제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나눠서 수행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반면, 조선은 정권이 몇 차례나 바뀌는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동시에 근대화를 수행해야 했다.
갑신정변을 대표적인 예시로 들 수 있다. 갑신정변에서는 많은 급진 개화파 인재가 희생되었으며,
유길준과 같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더라도 유학 보낸 인재를 급히 귀국시키는 등 직, 간접적인 피해가 컸다.
또, 개혁이 이루어진 시점 또한 매우 나빴다. 외세의 개입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당시 일본의 식민지화에까지 신경을 쓸 만한 외부 세력이 없었던 시기였던 반면,
조선은 인접한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경쟁하는 시점에 근대화를 이뤄야 했다.
여기에 러시아까지 끼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게다가, 일본의 전통적인 봉건제적 통치구조가 근대화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비록 막부 및 수많은 번의 재정 개혁을 비롯한 정책에는 대부분 문제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재정을 건전화하고 빠르게 서구 문물을 도입하며 하급 무사를 비롯한 새로운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등
성공적으로 개혁을 이뤄낸 소수의 번이 존재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중앙정부의 개혁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이를 대체할 다른 정치적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아가, 일본에서는 개혁 세력이 기존 기득권을 흡수하거나 대체하는 과정을 통해 개혁 작업에 국력이 집중될 수 있었으나,
조선은 비슷비슷한 이해관계를 가진 기존 지배세력이 자신을 점진적으로 개조해나가야 했다.
일본의 근대화조차 불완전한 측면이 있었는데, 하물며 조선의 근대화랴.

흔히 난학을 비롯한 양학이 일본의 근대화를 가능케 한 요소라고 일컬어지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난학자들이 주로 연구한 서양 의술이나 과학이 과연 서양 기술을 도입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을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세계 정세를 더 정확하게 파악해서 민첩하게 반응한 점이 더 결정적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에 수시로 사신을 보내며 정보를 수집했지만, 아편전쟁이나 보불전쟁에 대해
일본과는 달리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 사쓰마 번이나 조슈 번과는 달리 서양의 직접적인 침략을 받아 크게 패하고 나서도
(뭐 물러가긴 했지만 전투 내용을 보면 조선의 군사적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빠르게 개국과 근대화로 선회하지 못했다.

결국 19세기 조선의 사상적 경직성과 후진성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환재 박규수 연구>를 읽으면서 느낀 거지만, 19세기 조선은 18세기 후반에 비해 사상적으로 퇴보했다.
아, 물론 그 껍데기는 빌려왔지. 청나라를 중화 국가로 인정하기 시작한 점.
그러나 18세기 후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의 문제의식을 이들이 계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지원, 박제가는 결국 청나라의 제도와 기술을 본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홍대용은 새로운 우주관과 학문관의 정립을 주장했으나,
공통적으로 당대의 위선과 궁핍을 직시하고 외국 지식과 문물에 대한 개방적 수용을 통해
그러한 문제를 타파하고자 하는 공통적인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북학파는 어디까지나 18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활동했을 뿐이다.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같은 문제의식을 가졌더라도 새로운 정보와 환경에 맞춰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중화질서 유지를 기반으로 한 같은 답안을 고집했는데,
이는 실제로 그들이 북학파와 같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지는 못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일단 근대화 과정에 접어들고 나서는 조선(대한제국)과 일본의 차이는 좁히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조선이 특별히 '못난 개항'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개항 이전의 조선이 일본에 비해 특정 부분에서 못난 나라였을 따름이다.

덧글

  • 진냥 2018/10/06 03:08 # 답글

    메이지 유신과 인간 선언 사이 일본의 주권자인 천황은 사실 굉장히 고대적인 개념으로 움직이고 있었죠. (참고 자료 중 한 가지인 [천황의 하루] http://romancer.egloos.com/4830203 )

    또한 일본은 근대적인 정책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자금을 적잖이 청일전쟁의 배상금으로 충당하고, 결국 배상금을 받지 못한 러일전쟁 때에는 거의 국가 파산에 이를 지경이었지요. 전쟁에 상당 부분 힘입은 일본의 경제 정책은 인맥과 에도 시대때부터의 관행에 좌우된 결과 세계 대공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지요.

    일본의 근대 교육은 미국인 얼레인 아일런드가 건전하고 이상적이라고 평가한 교육칙어를 밑바탕에 깔고 있었는데, 실상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가르치는 교육으로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는 데에 기여하고 맙니다. 이는 [학교사로 보는 일본 근현대사]에서 대단히 흥미롭게 다루고 있는데 아직 블로그에 감상문을 쓰지 않아...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일본의.. 아마도 당시로서는 훌륭한 의료제도조차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농촌 위생](http://romancer.egloos.com/4839455)에서 묘사하는 1930년대 일본의 보건위생은 파탄일로였고, 끝내 정신의 육체화를 내세우며 라디오 체조를 보급하는 것으로 악화되는 국민보건을 눈가리고 아웅하고자 했습니다.

    그 시대 전체를 다루자면, '이 나라 이 시대는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왔으므로 근대화에 성공했다'라는 결과론적 관점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다.
    나아가 해당 시대의 복잡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근대화라는 명제에 있어 성공과 실패는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 근대화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것인가 오랫동안 의문을 가져왔습니다.
    다만 이런 의견도 있다고 알아주셨으면 하는 정도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acio2 2018/10/06 09:09 #

    일본의 근대화가 결점이 없었다거나 완전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은 근대화의 성공 정도에 있어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냥 조선의 자력 근대화가 실패한 요인, 그에 반해 일본의 자력 근대화가 (비교적) 성공한 요인에는 당시 위정자를 비롯한 개개인의 자질보다도 어떤 시기에 그런 시도가 이루어졌는가가 더 중요하고, 따라서 그런 시기적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히는 게 양국의 운명이 왜 갈렸는가를 조명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적은 글입니다.
  • 존다리안 2018/10/06 10:31 # 답글

    개인적으로 보면 아무리 천황숭배와 같은 전제적인 측면도 있었다지만 일본의 근대화가 커피면 한
    국의 근대화는 T.O.P인지라....ㅜㅜ

    한국의 복고주의는 벌써 정조 때 문체반정만 봐도 알 수 있죠. 무슨 소설을 옛 문장과 안맞는다고
    쓰지 말라고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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